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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住] 검은 돌에 새겨진 바람의 기억, 제주 돌담의 미학을 읽다

by 1시간전발행 이기자 2025. 11. 20.

검은 돌에 새겨진 바람의 기억, 제주 돌담의 미학을 읽다

 

제주 돌담 천 년 버틴 비결 바람과 싸우지 않았다.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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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머물다 가는 검은 틈새, 그 속에 담긴 제주의 숨결


제주의 해안 도로를 달리거나 구불구불한 마을 안길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에메랄드빛 바다도, 웅장한 한라산도 아닙니다. 바로 시야의 끝자락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며 풍경의 검은 밑줄을 그어주는 존재, '돌담'입니다. 육지의 반듯하고 매끄러운 담장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현무암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투박하게 쌓여 있는 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동시에 수백 년의 세월을 버텨온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저에게 돌담은 어린 시절부터 늘 곁에 있던 공기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과 숨바꼭질하며 몸을 숨기던 놀이터였고, 그저 내 집과 남의 집을 구분하는 단순한 '경계'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유난히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날 밤, 창밖의 돌담이 휘청이는 나무들을 묵묵히 지켜주는 모습을 보며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척박한 화산섬에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기 위해 고안해 낸 가장 지혜롭고 아름다운 건축술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제주의 돌담은 바람을 막되 가두지 않고, 소유를 주장하되 단절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주문화연구소]에서는 제주의 의식주 중 '주(住)'의 핵심이자, 제주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인 돌담의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투박한 돌 틈 사이에 숨겨진 과학적 원리와 역사적 애환, 그리고 현대적 가치까지 재조명해 봅니다. Tip: 이 글은 제주의 역사와 건축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인문학적 가이드입니다.

 

1. 투쟁이 아닌 순응의 역사: 왜 그들은 돌을 쌓아야만 했는가?


제주도는 흔히 '삼다도(三多島)'라 불립니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뜻이지요. 이 말 속에 제주 돌담의 기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제주 땅은 흙을 파내면 끝도 없이 돌이 나오는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일구려면 땅속에 박힌 돌들을 쉼 없이 골라내야 했고, 처치 곤란한 그 돌들을 밭 가장자리에 하나둘 쌓아 올린 것이 바로 돌담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돌담은 단순히 돌을 치우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거센 해풍은 연약한 농작물을 쓰러뜨리고, 초가집의 지붕을 날려버리기 일쑤였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바람과 싸워야 했지만, 자연을 거스르는 거대한 성벽을 쌓는 대신 자연의 재료인 현무암을 이용해 바람을 달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 시대 고종 때 김구(金坵) 판관이 제주 판관으로 부임하여 다음과 같이 돌담 쌓기를 장려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밭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방목하는 소나 말이 농작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게 하라."

이 정책을 통해 밭담이 체계적으로 확장되었고, 이를 '밭담'이라 부르는데, 이 밭담이 이어지고 이어져 지금의 '흑룡만리(黑龍萬里)'가 되었습니다. 검은 용이 만 리를 뻗어 나가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처럼 제주의 돌담은 권력자의 과시용 건축물이 아니라, 척박한 환경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보금자리를 지키려 했던 민초들의 피땀 어린 생존의 기록이자 역사입니다. 밭에서 나온 돌로 밭을 지키고, 집터에서 나온 돌로 집을 지키는 이 순환의 구조야말로 가장 완벽한 '제주다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이름마다 서린 삶의 풍경: 경계를 넘어선 돌담의 종류와 역할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저 다 같은 '돌담'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돌담은 놓인 위치와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마치 에스키모인들에게 눈을 지칭하는 단어가 수십 가지인 것처럼, 제주 사람들의 삶 속에 돌담이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올레담: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쌓은 골목 담입니다. 제주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인 '올레'를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이 담은, 거센 바람이 집 안으로 직접 들이닥치는 것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을 합니다.

울담: 집 울타리를 두르는 담입니다.

밭담: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담입니다. 흙과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막고 방목하는 소나 말의 침입을 막는 것이 주 목적입니다.

산담: 무덤 주위에 쌓은 담입니다. 망자의 집을 지키는 울타리이자, 방목 중인 가축이나 산불로부터 무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산담 한쪽에는 '신문(神門)'이라 하여 영혼이 드나드는 문을 따로 만들어 두기도 했는데, 이는 삶과 죽음이 단절되지 않고 공존한다는 제주 사람들의 내세관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해안가에서 원담(독살)을 쌓아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가두어 잡거나, 불턱(해녀들이 불을 쬐며 옷을 갈아입는 공간)을 만들어 바람을 피하는 등 제주 사람들은 돌을 이용해 의식주 전반에 걸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돌담은 그들에게 집이자, 밭이자, 어장이었으며, 영혼의 안식처였습니다.

 

3. 바람을 이기는 숭숭 뚫린 구멍의 미학: 엉성함 속에 숨겨진 고도의 과학


제주 돌담을 처음 보는 건축가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점은 '접착제 하나 없이 그저 돌만 얹어 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시멘트나 흙으로 틈을 메우지 않고,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얼기설기 쌓아 올린 방식. 이를 전문 용어로 '메쌓기(Dry masonry)'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툭 치면 무너질 것처럼 엉성해 보이지만, 바로 이 '엉성함' 속에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강력한 생존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틈 없이 꽉 막힌 벽은 강한 바람을 정면으로 맞받아칩니다. 바람의 압력을 고스란히 견뎌야 하기에 거대한 태풍이 오면 통째로 무너질 위험이 큽니다. 하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제주의 돌담은 바람에게 '길'을 내어줍니다. 돌 틈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면서 압력이 분산되고 속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를 유체역학에서는 '베르누이의 정리'와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돌담은 바람과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제 몸 사이로 흘려보내며 충격을 흡수합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노자의 철학이 건축적으로 구현된 완벽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무암 자체의 특성도 한몫을 합니다. 표면이 거칠고 모난 현무암들은 서로 맞물리면서 강한 마찰력을 만들어냅니다. 둥글둥글한 강돌이었다면 금방 미끄러져 무너졌겠지만, 모나고 거친 제주의 돌들은 서로의 요철을 꽉 깨물며 지탱합니다. 아래쪽에는 크고 무거운 돌을 두어 무게중심을 잡고(굽돌),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쌓으며, 중간중간 작은 돌멩이(뒷돌)를 끼워 넣어 흔들림을 방지하는 축조 기술은 현대 건축공학으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민중의 지혜입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제주 돌담이 수백 년을 버텨온 비결입니다.


4. 검은 선과 초록 생명의 조화: 현대 건축과 예술이 주목하는 돌담의 가치


과거의 돌담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의 산물이었다면, 현대의 제주 돌담은 미학적 가치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은 제주의 건축물에 돌과 바람, 물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했고, 안도 타다오 역시 제주의 현무암이 가진 원시적인 질감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최근 제주에 지어지는 수많은 카페와 펜션, 미술관들이 콘크리트 벽 대신 제주 고유의 돌담을 인테리어의 핵심 요소로 사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제주의 풍경을 완성하는 색채 대비를 떠올려 보십시오. 봄이면 유채꽃의 샛노란 물결, 여름이면 청보리의 푸른 물결, 가을이면 억새의 은빛 물결이 출렁입니다. 이 화려한 색채들이 가볍게 날아가지 않도록 무게감 있게 잡아주는 것이 바로 '검은 돌담'입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이자, 다른 어떤 색과도 조화를 이루며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색입니다. 검은 현무암 돌담이 배경이 되어주기에 제주의 초록 밭과 파란 바다,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주 돌담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될 만큼 그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옛것을 보존하자는 차원을 넘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재료를 활용하여 자연과 어우러지는 '생태 건축'의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벽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구멍 뚫린 돌담은 숨통을 틔워주는 치유의 선이자, 잃어버린 자연과의 연결 고리가 되어줍니다.


결론: 틈이 있어 아름다운 것들을 위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제주의 선(線)


지금까지 제주의 의식주 중 '주(住)'를 지탱해 온 든든한 버팀목, 제주 돌담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낭만적인 포토존일지 모르지만, 그 검은 돌 하나하나에는 거친 바닷바람을 견디며 삶을 일궈온 제주 사람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지혜가 서려 있습니다.

제가 이 블로그를 통해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이 돌담과 닮아 있습니다. 완벽하고 매끄러운 정보만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투박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경험과 통찰을 나누고 싶습니다. 돌담에 숭숭 뚫린 구멍이 있어 바람이 통하듯, 우리네 삶에도 빡빡한 일상 속에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틈'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주문화연구소가 여러분에게 그런 작은 틈, 숨 쉴 수 있는 돌담 같은 공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에게 '제주 돌담'은 어떤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나요? 댓글로 여러분만의 제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다음 시간에는 제주의 '의(衣)' 생활, 그중에서도 척박한 노동 환경 속에서 탄생한 세상에서 가장 실용적인 작업복, '갈옷'에 담긴 풋감의 과학과 멋에 대해 깊이 있게 다뤄보겠습니다. 제주의 바람이 전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제주문화연구소]의 여정에 계속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