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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문화

육지 사람은 절대 못 푸는 암호? 훈민정음의 잃어버린 시간을 품은 '제주어'의 비밀

by 1시간전발행 이기자 2025. 11. 21.

육지 사람은 절대 못 푸는 암호? 훈민정음의 잃어버린 시간을 품은 '제주어'의 비밀

[서론: 한국 땅이지만 한국말이 안 통하는 미지의 세계]

제주도를 둘러보다보면, 시끌벅적한 동문시장 할망들 틈에 서 있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분명 여기는 대한민국 영토이고 다들 한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귀에 들리는 소리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기묘한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이거 얼마마씀?" 하고 물으면 "경 하민, 멩심허영 갑서"라며 알 수 없는 미소로 답하는 그들.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이 낯선 언어 앞에서, 많은 여행자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낍니다.

 

흔히들 '제주 사투리'라고 부르지만, 언어학자들과 유네스코는 이것을 단순한 사투리가 아닌 **'제주어(Jeju Language)'**라는 독자적인 언어로 분류합니다. 거센 바닷바람을 뚫고 전달되어야 했기에 짧고 강렬해진 소리, 그리고 육지에서는 멸종된 중세 국어의 원형이 화석처럼 살아 숨 쉬는 신비한 언어. 오늘 '제주문화연구소'는 육지 사람들에겐 암호 같지만, 알고 보면 우리 민족의 600년 전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는 제주어의 타임캡슐을 열어보려 합니다.한번들어 보젠마씸~~!!


1. "맨도롱 또똣?" 훈민정음의 '아래아(ㆍ)'가 살아있는 유일한 화석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에는 하늘을 본뜬 둥근 점, '아래아(ㆍ)'라는 모음이 있었습니다. 육지에서는 시간이 흐르며 이 발음이 소실되고 문자마저 사라졌지만, 놀랍게도 제주에는 여전히 그 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제주 할망들이 "혼저 옵서예(어서 오세요)"라고 말할 때, 그 '혼' 자는 단순한 'O'나 'A' 발음이 아닙니다. 입을 동그랗게 모으고 혀를 깊숙이 당겨 내는, 현대 한국어 표기로는 적을 수 없는 깊고 울림 있는 소리입니다.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해진 "맨도롱 또똣(기분 좋게 따뜻하다)"이라는 말에도 제주의 감성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뜨겁다'는 물리적 온도가 아니라, 먹기 딱 좋을 만큼 미지근하면서도 속이 풀리는 훈훈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죠. 이처럼 제주어는 육지 표준어가 잃어버린 풍부한 모음 체계와 미묘한 감정선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은 제주도를 **'살아있는 국어 박물관'**이라고 부릅니다. 촌스러운 시골말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왕실의 언어와 고대 한국어의 우아함을 품고 있는 귀한 유산인 셈입니다.

2. 바람이 빚어낸 '압축의 미학', 짧지만 강렬한 소통의 기술

제주는 바람의 섬입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혹은 거친 파도 위 테왁(해녀의 부표)에서 소리를 지르면 바람 소리에 말이 흩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긴 문장을 짧게 줄이고, 억양을 강하게 넣어 의사소통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육지 사람이 "할머니, 저기 있는 저것은 무엇입니까?"라고 길게 물을 때, 제주 사람은 딱 한 글자로 끝냅니다. "기?" (그거?) 그러면 대답도 간결합니다. "기." (그래, 그거야.) 혹은 상대방의 말이 의심스러울 때 "무사?" (왜 그러는데?)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이 극단적인 압축과 생략은 불친절함이 아닙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에너지를 아끼고, 바람과 싸우며 정확하게 뜻을 전해야 했던 치열한 생존 본능의 결과입니다. 투박하고 퉁명스럽게 들릴지 몰라도, 그 안에는 상대를 향한 군더더기 없는 직관과 효율성이 담겨 있습니다.

3. '괸당' 문화가 만들어낸 우리만의 비밀 언어

제주어에는 유독 공동체를 강조하는 단어가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괸당'**입니다. 친척을 뜻하는 '권당(眷黨)'에서 유래한 말로, 제주에서는 혈연뿐만 아니라 학연, 지연으로 얽힌 끈끈한 관계를 모두 '괸당'이라 부릅니다. 좁은 섬바닥에서 서로 돕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삼춘(남녀 불문하고 이웃 어른을 부르는 호칭)"이라 부르며 서로를 가족처럼 챙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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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끈끈함은 언어에도 배어 있습니다. "밥 먹언?"(밥 먹었어?)이라는 짧은 인사말 속에는 단순히 끼니를 묻는 것을 넘어, "오늘 별일 없지? 우리 서로 챙겨주자"라는 깊은 연대감이 깔려 있습니다. 육지 사람들이 듣기엔 배타적인 암호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외부의 침입과 수탈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서로를 결속시키기 위한 **'마음의 울타리'**였습니다. 제주어를 안다는 것은 곧 이 '괸당'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유네스코가 경고한 '소멸 위기', 사라지는 것은 말이 아니라 영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언어는 지금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2010년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 4단계로 지정했습니다. 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만 사용하고 부모 세대는 이해는 하지만 쓰지 않는 단계, 즉 곧 사라질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표준어 교육이 강화되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제주의 아이들조차 "할망, 그게 무슨 말이야?"라고 되묻는 실정입니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개가 없어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언어 속에 담긴 제주의 역사, 신화, 그리고 '수눌음' 정신과 같은 고유한 사고방식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제주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훈민정음의 비밀을 간직한 소중한 도서관을 하나씩 잃고 있는 셈입니다.


" 여행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념품"

제주를 여행하면서 초콜릿이나 감귤을 기념품으로 사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제주어 한마디'**를 마음속에 담아가시는 건 어떨까요? 식당에서 나올 때 "잘 먹었습니다" 대신 **"잘 먹었수다, 멩심허영 갑서(조심히 가세요)"**라고,다음엘랑도 들리쿠다라고  서툴게나마 인사해 보세요. 무뚝뚝해 보이던 식당 이모님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 순간 여러분은 단순한 관광객(이방인)이 아니라, 제주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진정한 친구(괸당)가 되는 마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6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소통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주문화연구소가 추천하는 가장 값진 여행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