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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문화

화려한 디저트는 가라, 거친 바람과 시간이 빚어낸 제주의 진짜 소울 푸드 '보리빵'

by 1시간전발행 이기자 2025. 11. 21.

제목: 화려한 디저트는 가라, 거친 바람과 시간이 빚어낸 제주의 진짜 소울 푸드 '보리빵'

 

 달콤한 향기 대신, 시큼하고 구수한 '삶'의 냄새

 

 

제주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 양손에 무엇을 들고 계십니까? 혹시 공장에서 찍어낸 감귤 초콜릿이나, 육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케이크 상자는 아닌가요? 물론 그것들도 달콤하고 맛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문화연구소'는 여러분이 조금 더 투박하고, 조금 더 못생긴 빵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제주 보리빵'**입니다.

 

유명한 보리빵 가게 앞을 지나면

버터나 설탕의 달콤한 향기 대신 어딘가 시큼하면서도 묵직한 곡물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막걸리로 발효시킨 반죽이 찜기 안에서 뜨거운 김을 토해내며 익어가는 냄새죠. 겉모습은 세련되지 않습니다. 둥글넙적하고 누르스름한 것이 마치 제주의 오름을 닮기도 했고, 거친 현무암을 닮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빵에는 척박한 화산섬에서 쌀 한 톨 구경하기 힘들었던 시절, 굶주린 배를 채워주던 제주 사람들의 눈물과 끈기가 반죽처럼 엉겨 붙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겉멋 든 디저트가 흉내 낼 수 없는, 제주의 '진짜 맛'을 씹어보려 합니다.


1. 쌀이 없으면 굶어야 하나? 척박한 땅이 준 '검은 선물'

육지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춘궁기의 슬픈 추억으로 기억하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보리는 생존 그 자체였습니다. 화산회토로 이루어진 제주의 땅은 빗물이 금방 빠져버려 벼농사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뿌리를 내리는 '보리'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죠.

제주 어머니들은 귀한 쌀 대신 거친 보릿가루를 빻아 반죽했습니다. 하지만 이스트 같은 세련된 발효제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것이 **'쉰다리(제주식 막걸리 발효 음료)'**입니다. 남은 밥이나 곡물을 발효시켜 만든 천연 효모를 반죽에 섞어 부풀린 것입니다. 즉, 제주 보리빵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생물의 힘까지 빌려온 **'바이오 기술의 결정체'**이자 **'생존의 발명품'**입니다. 씹을수록 느껴지는 특유의 쫄깃함과 은은한 산미는 바로 이 치열한 생존의 역사에서 비롯된 맛입니다.

2. '속'이 없어도 괜찮아, 본질에 집중하는 '담백함의 미학'

요즘 빵들은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로 승부합니다. 크림이 넘쳐흐르거나, 단팥이 가득 차 있어야 팔립니다. 하지만 제주 보리빵의 '원조'는 아무런 앙금도 들어있지 않은 '개떡(보리개역)' 혹은 **'쑥빵'**입니다. 처음 먹는 외지인들은 한 입 베어 물고 당황합니다. "무슨 맛이지? 아무 맛도 안 나는데?"

하지만 두 번, 세 번 씹다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자극적인 단맛이 사라진 자리에, 보리 특유의 구수함과 은은한 단맛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미각의 허세를 걷어낸 **'본질의 맛'**입니다. 마치 화려한 화장을 지운 민낯처럼, 재료 본연이 가진 힘을 믿는 빵이죠.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조미료와 설탕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제주 보리빵은 그런 우리에게 "가끔은 심심해도 괜찮아, 그게 진짜 건강한 거야"라고 말을 건네는 듯합니다. (물론, 관광객을 위해 단팥을 넣은 보리빵도 있지만, 진정한 고수는 아무것도 없는 '알빵'을 선택합니다.)

3. 패스트푸드(Fast Food) 시대에 저항하는 '슬로 푸드(Slow Food)'

공장에서 찍어내는 빵은 이스트를 넣으면 1시간 만에 부풀어 오릅니다. 하지만 전통 방식의 제주 보리빵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더 오래 기다리고, 습도가 높으면 숨을 조절하며 천천히 발효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찜기 뚜껑을 열었을 때 탱글탱글하게 부풀어 오른 빵은,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기다림의 예술'**입니다.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밀가루 빵과 달리, 천연 발효된 보리빵은 소화가 기가 막히게 잘 됩니다. 제주 할망들이 "속 거북할 땐 보리빵 하나 묵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뱃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약이자, 바쁜 현대 사회의 속도전에 지친 위장을 위로하는 처방전입니다. 빠르고 자극적인 것만 찾는 세상에서, 느리지만 속이 편한 보리빵은 우리에게 **'느림의 미학'**을 가르쳐줍니다.

4. 줄 서서 사 먹는 빵? 아니요, '나눔'의 빵입니다

유명한 보리빵 집 앞에는 늘 긴 줄이 늘어서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보리빵은 돈 주고 사 먹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나 명절, 잔치가 끝나면 남은 보릿가루와 쉰다리로 빵을 쪄서 이웃들과 나눠 먹던 **'정(情)의 상징'**이었습니다.

"혼저 왕 먹읍서(어서 와서 드세요)." 담벼락 너머로 갓 쪄낸 뜨끈한 보리빵을 건네던 그 마음. 겉은 투박하고 거칠지만, 속은 그 어떤 카스테라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제주 사람들의 **'속정'**이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 먹는 보리빵 하나에는, 가난했지만 서로 콩 한 쪽도 나누려 했던 옛 제주 공동체의 넉넉한 인심이 화석처럼 박혀 있는 것입니다.


진짜 여행자는 '맛'이 아니라 '땅'을 씹는다

여행의 끝에서 화려한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을 사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건 공장의 맛이지 제주의 맛은 아닙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못생기고, 조금 촌스러운 보리빵 한 상자를 품에 안아보세요.

집으로 돌아와 전자레인지가 아닌 찜기에 살짝 쪄서 한 입 베어 물면, 제주의 거친 바람과 따스한 햇살, 그리고 어머니의 손맛이 입안 가득 퍼질 것입니다. 그것은 빵을 먹는 게 아닙니다. 제주의 **'땅'**과 **'시간'**을 먹는 것입니다. 화려함에 가려진 진짜 가치를 아는 당신, 그 투박한 보리빵이 당신의 여행을 더 깊고 구수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