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경 너머에 살아 숨 쉬는 거인의 전설
비행기 창문 너머로 제주도가 보일 때, 여러분은 무엇을 보시나요? 솟아오른 한라산과 그 주변에 올록볼록 흩뿌려진 수백 개의 오름들. 지질학자들은 이것을 화산 활동의 결과물이라고 말하지만, 제주의 옛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믿었습니다. 저 거대한 섬은 사실, 태초에 한 거인 여신이 치마폭에 흙을 담아 나르며 빚어낸 '작품'이라고 말이죠,마치 sf소설속 신비로운 주인공처럼요
그 여신의 이름은 **'설문대할망'**입니다. 키가 얼마나 컸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눕고,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 관탈섬에 걸쳐놓고 잠을 잤다고 전해집니다. 빨래할 때면 한 발은 한라산에, 다른 한 발은 서귀포 앞바다 지귀도에 디디고 섰다는 상상 초월의 거인. 오늘 '제주문화연구소'는 아름다운 풍경 사진 뒤에 숨겨진, 제주를 창조하고 끝내 자신의 몸을 바쳐 자식들을 먹여 살린 위대한 어머니 신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이 신화를 알고 나면, 무심코 오르던 오름 하나하나가 거인의 숨결처럼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1. 치마폭에서 떨어진 흙덩이, 360개 오름이 되다
태초에 제주 섬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였습니다. 그때 설문대할망이 나타나 육지에서 흙을 퍼다가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부지런히 흙을 날라 한가운데 쌓은 것이 바로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입니다. 그런데 흙을 너무 높이 쌓다 보니 꼭대기가 뾰족하여 하늘에 닿을 듯했습니다. 그래서 할망은 그 뾰족한 부분을 툭 쳐서 떼어내 산방산 쪽에 던져버렸는데, 그것이 지금의 '산방산'이 되었고, 움푹 파인 한라산 꼭대기는 '백록담'이 되었다는 재미난 전설이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제주의 상징인 '오름'의 탄생 비화입니다. 할망이 흙을 나르던 치마는 낡고 해져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습니다. 그 터진 구멍 사이로 흙이 조금씩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는데, 그 흙덩이들이 굳어서 지금의 360여 개 오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질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기생화산이지만, 신화적으로 해석하면 오름은 **'창조의 땀방울'**이자 **'노동의 흔적'**입니다. 척박한 섬을 일구기 위해 쉼 없이 움직였던 거인의 부지런함이 제주 곳곳에 봉긋한 언덕으로 남아있는 셈입니다.
2. 백록담을 솥뚜껑 삼아, 은하수를 웅덩이 삼아
설문대할망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습니다. 그녀에게 제주의 자연은 거창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생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성산일출봉의 분화구는 그녀가 빨래할 때 쓰는 빨래 바구니였고, 우도는 빨래판이었습니다. 심지어 밤이 되면 한라산 백록담을 베개로 베고 누워, 밤하늘에 흐르는 은하수를 손으로 휘저으며 물장구를 쳤다고 합니다.
이 호방하고 거침없는 신의 모습은 섬이라는 갇힌 공간에 살면서도, 마음만은 저 넓은 우주와 바다를 품고자 했던 제주 사람들의 기상을 대변합니다. 작고 척박한 땅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빚고 우주를 놀이터로 삼는 주체적인 존재. 설문대할망 신화는 험난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삶을 개척해 온 제주인들의 **'대담한 상상력'**과 **'자존감'**의 원천이었을 것입니다.
3. 500명의 자식을 위해 끓는 솥에 몸을 던진 비극
하지만 이 웅장한 창조 신화의 끝에는 가슴 아픈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문대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오백장군)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할망은 아들들을 먹이기 위해 커다란 가마솥에 죽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러 나간 사이, 할망은 솥뚜껑 위를 오가며 죽을 젓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펄펄 끓는 솥 안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들은 어머니가 죽 속에 빠진 줄도 모르고, 그날따라 유난히 맛있는 죽을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막내아들이 국자를 젓다가 솥 바닥에서 어머니의 뼈를 발견하고는 통곡하며 뛰쳐나가 바위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머지 형제들도 피를 토하며 울부짖다 한라산 영실기암의 기암괴석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 자신의 육신을 음식으로 내어준 이 **'자기희생(Self-sacrifice)'**의 모티브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헌신했던 제주 어머니들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어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4. 신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주 여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뿐
설문대할망은 비록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녀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땅을 일구는 억척스러운 농부의 손길 속에, 거친 파도에 맞서 물질하는 해녀의 숨비소리 속에 설문대할망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제주가 '삼다도(돌, 바람, 여자가 많은 섬)'라 불리며, 특히 여성이 강한 생활력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이유는 단순히 남자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태초부터 이 땅을 빚어내고,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거대한 **'모성(Maternity)'**의 신화가 그들의 무의식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의 여성들은 스스로를 설문대할망의 딸이라 여기며, 어떤 고난이 닥쳐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가족과 삶을 지켜내 왔습니다.
[ 오름에 오를 때, 거인의 품에 안기듯]
이제 다시 제주의 풍경을 바라보십시오. 올록볼록 솟은 오름은 단순히 예쁜 언덕이 아니라, 치마폭에서 흙을 흘리며 땀 흘리던 할머니의 흔적입니다. 한라산 영실기암의 기묘한 바위들은 어머니를 잃고 울부짖던 아들들의 눈물입니다.
제주 여행은 단순히 맛집을 찾고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 서려 있는 슬프고도 위대한 신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주의 진짜 속살을 만나는 가장 깊이 있는 여행법일 것입니다. 다음번 오름에 오를 때는 잠시 멈춰 서서 바람 소리를 들어보세요. 우리를 위해 흙을 나르던 거인 여신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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