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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문화

바람의 섬이 끓여낸 영혼의 수프, '몸국'에 담긴 제주의 눈물과 미학

by 1시간전발행 이기자 2025. 11. 21.

바람의 섬이 끓여낸 영혼의 수프, '몸국'에 담긴 제주의 눈물과 미학


[ 잔칫날의 기억, 돌담 너머로 퍼지던 그 쿰쿰한 향기]

 

제주의 겨울바람은 유난히 매섭습니다. 현무암 돌담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그 칼바람을 맞아본 사람만이, 왜 제주 사람들이 그토록 뜨거운 국물에 집착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화려한 뷔페가 결혼식 피로연을 대신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제주의 결혼식은 마을 전체의 축제이자 생존을 확인하는 엄숙한 의식이었습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가 있었습니다. 육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는,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묵직하고, 구수하면서도 쿰쿰한 기묘한 향기. 바로 가마솥에서 펄펄 끓고 있는 **'몸국'**의 냄새입니다.

이 국은 단순한 음식이 아닙니다. 척박한 화산섬에서 단백질 한 점이 귀했던 시절,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공평하게 고기 맛을 보고 배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낸 '나눔의 미학'이자 '생존의 지혜'입니다. 돼지고기 삶은 육수에 바다에서 건져 올린 모자반(몸)을 넣고 끓여낸 이 걸쭉한 국 한 그릇에는, 거친 바다와 싸워야 했던 제주 사람들의 애환과 공동체 정신인 '수눌음'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늘 '제주문화연구소'에서는 관광객들이 줄 서서 먹는 흑돼지 구이 뒤편에 숨겨진, 진짜 제주의 소울 푸드 '몸국'의 깊은 이야기를 숟가락으로 떠먹듯 음미해 보려 합니다.


1. 혼례의 서막, '돗 잡는 날'의 신성한 의식과 공동체 정신

 

제주의 전통 혼례는 보통 3일 동안 치러졌습니다. 그 첫째 날을 '가문잔치'라고 부르는데,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돼지(돗)를 잡는 일이었습니다. 제주에서 돼지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었습니다. 뱀이 많은 화산섬의 지리적 특성상 뱀을 쫓아주고, 인분을 처리해 주며,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 비로소 식탁에 오르는 귀한 자산이었습니다. '돗통(돼지우리)'은 제주의 주거 문화에서 화장실과 연결된 가장 내밀한 공간이었기에, 돼지를 잡는다는 것은 한 가족의 역사와 시간을 잡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고기의 양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마을 사람 수백 명을 먹여야 하는 잔칫날, 고기를 구워서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습니다. 여기서 제주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가 발휘됩니다. 뼈와 내장, 그리고 살코기를 삶아낸 진한 육수를 버리지 않고, 그 양을 수십 배로 불리기 위해 바다의 해초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요리법이 아니라, "단 한 사람도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돌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제주 공동체의 철저한 평등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몸국은 그렇게 고기 맛을 보고 싶은 욕망과,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당위가 솥 안에서 뜨겁게 융합된 '사회적 합의'의 음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바다의 잡초 '몸', 돼지기름을 만나 최고의 식재료로 다시 태어나다


육지 사람들에게 '모자반'이라 불리는 해초를 제주에서는 '몸'이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직관적이고 투박한 이름입니다. 겨울철 제주의 얕은 바다 갯바위에서 흔하게 채취할 수 있는 이 해초는, 사실 단독으로 먹기에는 식감이 억세고 특유의 비릿함이 있어 환영받는 식재료는 아니었습니다. 미역처럼 부드럽지도 않고, 파래처럼 향긋하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 거친 '몸'이 돼지고기 육수라는 기름진 토양을 만나는 순간, 마법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돼지뼈를 푹 고아 낸 육수의 느끼한 지방 성분을 모자반의 알긴산 성분이 기가 막히게 중화시켜 줍니다. 반대로 모자반의 억센 식감은 뜨거운 기름을 머금으며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부드러워집니다. 씹을 필요도 없이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는 그 독특한 식감은 오직 몸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입니다. 여기에 메밀가루를 풀어 국물의 농도를 잡습니다. 메밀 역시 쌀이 귀한 제주에서 주식(主食) 역할을 했던 작물입니다. 돼지고기, 모자반, 메밀. 제주의 땅과 바다, 그리고 바람이 키워낸 이 세 가지 재료가 가마솥 안에서 엉겨 붙어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척박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것들을 융합하여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낸 제주 선조들의 '융합적 사고'를 보여줍니다.

 

3. '배지근하다'라는 말의 원형, 오감을 자극하는 미식의 절정

 

제주 방언 중에 "배지근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육지 말로 번역하자면 '국물이 진하고 기름지면서도 감칠맛이 돌고 묵직하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데, 사실 이 말의 뉘앙스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음식이 바로 몸국입니다. 숟가락을 넣으면 맑은 국물이 아니라, 마치 죽처럼 걸쭉하고 묵직한 저항감이 손끝에 전해집니다. 한 입 떠서 입에 넣으면, 처음에는 돼지 사골의 구수함이 혀를 감싸고, 이어서 모자반의 톡톡 터지는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풀리는 식감이 입안을 채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메밀가루의 담백함이 느끼함을 싹 잡아줍니다.

이것은 현대의 셰프들이 추구하는 '레이어(Layer)가 풍부한 맛'의 원조 격입니다. 특히 몸국은 김치나 깍두기 같은 반찬 없이도 그 자체로 완벽한 요리가 됩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 접하는 낯선 비주얼과 향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마치 늪처럼 걸쭉한 갈색 국물이 식욕을 자극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하지만 눈을 감고 그 맛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 안에는 화려한 조미료 맛이 아닌, 재료 본연이 가진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습니다. 추운 겨울, 뜨거운 몸국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든든함이 차오르는 경험. 이것이 바로 제주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배지근함'의 미학입니다.


4.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관광지 식당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맛


안타깝게도 요즘 제주를 찾는 많은 관광객은 진짜 몸국의 맛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관광지 식당 메뉴판 귀퉁이에 적힌 몸국은, 대량으로 유통되는 냉동 육수에 건조 모자반을 대충 불려 끓여낸 '인스턴트'에 가까운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진짜 몸국은 돼지 내장(수애)까지 썰어 넣어 더욱 진하고 콤콤한 냄새가 나야 하며, 솥 바닥이 눌어붙지 않도록 꼬박 반나절을 나무 주걱으로 저어주던 정성이 들어가야 제맛이 납니다.

최근에는 젊은 층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맑고 깔끔하게 변형된 '퓨전 몸국'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만, '제주문화연구소'의 시선으로 볼 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음식은 단순히 혀끝의 즐거움을 넘어 그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낡은 오일장 한구석, 혹은 마을 골목길 허름한 식당에서 투박한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거무튀튀한 몸국을 만난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 보십시오. 그것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라, 수백 년을 이어온 제주의 거친 생명력을 마시는 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제주 여행이 조금 더 깊어지기를 바라며"

 

우리는 여행을 통해 낯선 풍경을 보고, 낯선 음식을 먹으며 일상의 환기를 얻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의 묘미는 그 지역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주의 푸른 바다와 예쁜 카페도 좋지만, 한 번쯤은 이 투박하고 못생긴 국 한 그릇 앞에 앉아보시길 권합니다.

그 걸쭉한 국물 속에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서로를 의지했던 제주 사람들의 뜨거운 눈물과 끈끈한 연대, 그리고 삶을 긍정하는 강인한 태도가 녹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몸국이 왜 '몸(Body)'에 좋은지, 그리고 왜 제주의 '몸(Spirit)'인지 알게 되셨을 겁니다. 이 글을 읽고 난 뒤 떠나는 제주 여행에서, 우연히 마주친 몸국 간판이 예전과는 다르게 보인다면, 오늘 '제주문화연구소'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